한국기독교사상사

제1강 조선은 어떤 나라일까?


조선은 어떤 나라일까?

조선은 군사 구테타로 세워진 나라이다. 형식적 의미에 있어서 조선은 고려를 뒤엎고 세 워진 나라이다. 조선은 고려의 국교(國敎)였던 불교(佛敎)를 억제하며, 공자와 맹자의 사상 을 중요시하는 유가철학(儒家哲學)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을 기초한 사상가로는 삼봉 정도전을 꼽을 수 있는데, 특별히 종교와 관련하여서는 그의 [불씨 잡변(佛氏雜辨)]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지옥설은 다 낮은 근기(下根)의 사람들을 위 해 이렇게 겁나는 지옥설을 만들어 착한 일을 하게 할 뿐이다.” 한다. 정자(程子) 는 이에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이 천지를 관통하여도 오히려 사람이 감화되지 못 하는데, 어찌 거짓된 가르침에 사람이 감화 될 수 있겠느냐?”(중략) 옛날에 어떤 중이 나에게 묻기를,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 겠느냐?” 하기에 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 워함은,(중략)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한번이라도 악명(惡名)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 리를 맞은 듯이 여기나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느 냐?”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1)

이 말은 지옥으로 겁주어 사람의 바른 행실을 유도할 수 있다든가, 내세(來世)관으로 사 람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어리석음과 거짓 교설이라는 내용으로 답변한 정도전의 논박(論駁)이다.

그렇다면 정도전의 말을 더 들어보자.

“봉상사 탑에 부처의 지골(指骨)이 있어 전하여 오는데, 30년 만에 한 번씩 탑문을 열며, 탑문을 열면 그 해에 풍년이 들며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낸다고 합니다.(중 략)” 이에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중략) 한 명제(漢 明帝) 때에 비록 불법(佛法)이 들어왔는데, 그 후 어지럽고 망함이 서로 계속되어 나라의 운수가 길지 못하여(중 략) 나라의 연대는 더욱 단촉 되어 졌습니다.2)

즉불교를 미신적으로대할 때문제가 컸음을알 수있다. 이는미신을 반대한것이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이성(理性)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 다.

“우리 부처에게로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비 록 열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면화를 면하고 아무 리 도(道)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아니하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가령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사심에서 나온 것이요, 공 도가 아니니 징계해야 할 것이다.3)

이는합리성에 따라종교의미신적이고, 부당한것을지적한 것이라할수 있으므로그

는 이성의 기능을 존중히 여긴 셈이다. 그래서 정도전의 종교비판은 헤겔의 기독교 비판 보 다 대략 400 년가량 앞선 것이었으며, 칼 바르트나 디트리히 본회퍼의 종교 비판 보다는 약 600 년 앞선 것이었다. 물론 칼빈이 미신을 반대한 것을 생각한다면 정도전과 시기적으 로 가까워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도전은 칼빈보다 확실히 앞선 시기의 사람이었다(한 200년 정도). 그러나 사실은 불교가 아주 뛰어난 철학 체계를 가진 것은 뚜 렷했다. 단지 정도전은 고려 말의 불교가 가진 폐해를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 다. 그래서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잘못되었다는 비판도 있다.4) 불교 사상의 위대성에 대해 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이체도 지적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수하게 도덕적인 가치 정립(이를테면 불교의 그것처럼)은 어느 것이나 니힐니즘 으로 끝난다. 이것은 유럽에서도 기대할 수 있다.5)

그리고 니이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6) 인간이란, 초극(超克)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런데 불교는 인간의 의지나 초극(超克)을 강조한 사조이다. 개인적 견해이긴 하지만 한국에 있었던 어느 고승(高僧)이라면 결코 니이체나 그가 투영시킨 “짜라투스트라” 못지않 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고려의 고승은 니이체보다 대략 500년에서 멀게는 천년 정도 앞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가의 고승인 경우, 순수하게 범신론적으로 볼 때 영적 깊 이가 폴 틸리히 보다 못할까? 틸리히를 능가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이 미 한국은 사상의 누각을 오래 전부터 경험한 셈이다. 그런데 문명과 종교의 금자탑을 쌓아 올린 한국에서 어떤 이유로 서양의 전(前)천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종말론적 개신 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폴 니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영향은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선교활동이 19세기 동안이나 실제로 무엇을 이룩하였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볼 때 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나타난다.(중략) 그러 나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목표를 “개종”으로 간주한다면, 그 현실은 별로 좋 은 인상을 주지 못할 것이며, 실제로는 실망을 주게 될 것이다. 2000년 동안의 노 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숫자는 세계 인구의 31퍼센트에 불과하 다.(중략) 우리는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회심자들의 대부분은 다신적 종교나 정령적 종교 혹은 자기 백성들의 영혼 에 대한 인격적인 영향력을 이미 상실한 종교들에 속했던 자들이었다.(중략) 이러 한 사실과 관련하여 한 저명한 교회사가는, 그리스도교는 20세기에 이르러 “이슬 람교와 흰두교와 불교로부터 거의 개종자를 얻어내지 못하였다.”고 술회하고 있 다.7)

그렇다면 한국은 불교와 유가철학의 사조가 있었기 때문에 서양종교가 뿌리 내리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야 할 텐데 어떤 이유로 한국에서는 개신교회가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 라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었을까? 물론 조선 시대에도 민중(民衆)층에서 혼합적 종교현 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래종교 중 하나인 서양 개신교회가 조선 사회에서뿌리를 내릴수 있었던데에는 그만한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그이 유 중 한 가지는 정치적 상황을 꼽을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조선은 명(明: china)나라를 섬 기던 나라였다. 이런 인식은 정도전의 사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 다.

이들은 모두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중국의 명령을 받지않고서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서로 침탈하였으니비록호칭한것이있다 손치더라도무슨취할게 있겠 는가? 단 기자만은 주 무왕(周武王)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9)

여기서 정도전이 말하는 “이들”은 단군, 기자, 위만, 신라, 백제, 후백제, 고구려, 후고구 려(고려)를 일컫는 것으로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 있었던 나라들을 일컬은 것이다. 이로 볼 때 정도전의 역사관은 철저히 차이나(china)중심의 사대관(事大觀)을 가졌음을 볼 수 있 다. 그러나 그 명나라는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여진족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조선이 우상처 럼 섬기던 그 대국(大國) 명(明)나라는 이름 하여 ‘야만족’에게 멸망을 당하여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진족을 ‘오랑캐’라며 폄하하였던 조선은 혼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조선의 세계관에서는 명나라가 가장 중요하고도 큰 나라였지만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그 사조는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에 생긴 명(明)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자기들 것이라며 우겼다. 그리 되면 만 주의 여진족들은 명나라의 지배 아래에 들어간다. 이에 반대한 사람이 최영이다. 그러나 그 최영을 죽이고,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이 이성계였다. 바로 그 이성계가 세운 나라 에 “건국이념”을 제공한 사람이 정도전이다.

그렇다면 정도전은 애국심이 없었거나 적어도 국익에는 상당히 심각할 정도로 취약했다. 앞에서 인용한 것 이외에도 정도전의 소중화적(小中華的) 모화사대관(母華事大觀)은 곳곳에 서 드러난다. 그러면 정도전의 종교관(신관)은 어떠했을까? 정도전은 비(非)종교주의자이거 나 무신론자였을까?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백성에게 공덕이 있는 신(神)들이니,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산천(山川)의 신을 제사하는 것은 그들이 구름과 비를 일으켜서 오곡(五穀)을 무르익게 하여 백성의 식량을 풍족하게 해 주기 때문이요, 옛날의 성현 (聖賢)들을 제사하는 것은 그들이 때를 만나서 도를 행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구제하 고, 법을 세우고, 교훈을 내려주어서 후세에 밝게 제시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사전(祀典)에 올려 장기적인 제사를 지내야 한다.10)

바람, 구름, 우뢰, 비는 오곡을 살찌게 하고, 풍류를 이루게 하는 것이니, 만물에 미치 는 혜택이 지극히 큰 것이다.11)

이를 따라서 본다면 조선시대를 설계했던 정도전의 경우, 신(神)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 신명(神名)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가 말한 신(神)이 무슨 신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 본다면 범신론적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정도전은 사람에 대한 제사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옛날의 성현(聖賢: 즉 공자, 맹자) 이었다. 이럴 경우 정도전은 충분히 사대(事 大)의 예(禮)를 갖추도록 그 기초를 닦아놓은 셈이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조선 초기와는 사뭇 다른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일이다.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 당하다. 삼대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 “조 선”은 箕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大韓이란 이름을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나라에서 이런 이름을쓴 적이 없 다. 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의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마한, 진한, 변한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12)

그 당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 제국을 세울 때의 의지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

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삼한을 이어, 큰 한 이다. 2) 더 이상 차이나(china)에게 종속되지 아니한다. 즉 차이나로부터 독립한다. 3) 원수(元首)의 칭호는 왕이 아니라 황제이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을 ‘전하’로 낮추어 부르면서 명(明: china)나라를 높였지만 대한제국이후부터 는 자국의 원수(元首)를 ‘황제’로 칭하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조선이 세워질 당시의 상황에 주목해 보자. 고려는 매우 끈질긴 나라였

다. 고려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였던 몽고에 맞서 약 40년을 버틴 나라다. 그 런데 그 고려는 어떻게 해서 무너졌을까? 그 이유는, 이성계라는 한 명의 장군과 그 무리들 때문이었다. 고려의 장군 최영은 10만 명의 군대를 만들어 요동으로 보내었다. 즉 명나라에 맞서 싸우라고 엄청난 군대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전투 한 번 해보지도 않고 그냥 돌아왔다. 즉 몽고에 맞서서는 40년이나 버틴 나라가 고려인데, 중국에 맞서서는 전투 한 번도 해보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는 뜻이다. 명나라와 싸우러 간 군인들은 도리어 명나라 의 앞잡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들의 상관인 최영을 죽이고 세운 나라가 조선이었 다. 이 조선이 아주 중요시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유교다. 특히 조선에는 조상 숭배의 강한 관습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유교의 풍속과 조상숭배와 미신들을 박살내버린 종교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신교였다. 즉 기독교는 조선의 정신적(종교적) 이념을 박살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 다. 더러는 문화와 상황화 또는 ‘하나님의 선교’와 같은 방식의 주장으로 그 조선을 인정하 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서구 세계의 제국적 유죄는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국가적 정체성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졌던 나라 였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의 조선은 아무 런 희망도 없어 보일 만큼 정책적으로는 무기력했다. 즉 이성계의 조선으로서는 아무런 희 망도, 아무런 능력도 보여 줄 수 없던 그 시기에 기독교는 엄청난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의 낙관론이란,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말하는 그런 수준의 정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에는 비행기에 고속철까지 다닌다. 하지만 그 경계는 휴전선을 넘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 옛날 말 타고, 증기기관차 타고,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압록강을 넘어, 만주대륙 을 횡단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최초로 세워진 것은 1907년 이다. 그 때 최초로 한국인 목사들이 세워 진다. 그리고 간략하기는 하지만 임시채용으로 신조와 교회정치도 선 포 된다. 이 때 선포된 교회헌법은 간략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변 화를 겪는데, 1922년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보고가 된다. 즉 교회헌법이 일단락 된 것 이다. 물론 여전히 미약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채용되었다. 그런데 1922년도의 사건을 보고 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922년도 총회의 회의록에 의하면 ‘남만노회’ ‘간도동노회’ ‘산서동노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1922년도 당시에는 만주가 조선예수교 장로회 안 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1931년도의 만주사변 이후부터 만주가 조선 과 통일이 되지 않았겠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22년도이면 만 주사변이 일어나기 약 9년 전이었다. 1930년대 총회의 회의록을 보면 ‘내몽골’에 대해서도 나온다. 즉 조선예수교 장로회는 내몽골 지방까지 신경을 써야 할 접경지역이었다는 뜻이 다. 이와 같이 교회는 시대를 주도하며 시대를 앞서 갔다. 우리는 흔히 ‘통일’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으로 통일을 할 것인가?’ 사람들은 종종 통일을 말할 때 ‘어떻게?’ 에 집중 한다. 그래서 방법을 말하지만 사실은 ‘어떤 기준으로’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이게 없으면 방법이 나와도 의미가 약해진다. 현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포함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바르지 못한 인식이다. 도대 체 어디를 기준으로 하였기에 대한민국의 영토가 한반도에 국한 되는가? 이미 1922년도의 교회 회의록에 간도동노회와 산서동노회, 그리고 남만노회가 있었을 만큼 교회의 통치영역 이 확장되어 있었는데, 무슨 연유로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국한한단 말인가? 이는 역사인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 니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자. 남북이 분단되는 데에는 고작 8일 가량이 걸렸다. 그러면 소 련이 침공하기 약 보름 전에는 통치권이 어디까지 였는가? 이는 물으나 마나다. 제주도에서 부터 만주까지였다. 제주도에서부터 요동반도 까지였다. 제주도에서부터 중국산동성 일대까 지였다. 그런데 어째서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만족하는가? 초기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그 노회가 세워지기도 전에, 이미 만주에서부터 성경이 한반도로 들어 왔 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복음은 만주로부터였다. 조선예수교 장로회가 있었을 당시에는 우 리교단의 신학교가 평양에 있었다. 이름 하여 평양신학교였다. 그 시대에 우리 선조 목사님 들은 만주에서도 공부를 하였다. 이름 하여 ‘봉천신학교’ 이다. 그러나 단 8일 밖에 참전하 지 않은 소비에트 연방군은 이 모든 것을 한 달 안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소련군 장교 출 신이었던 김일성 혹은 김성주라고도 하던데, 그 친러파 군인은 한국전쟁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만주마저도 중국의 모택동에게 넘겨주게 될 계기를 마련하고 말았다. 바로 그것이 남 한을 침공한 결과였다. 일본은 20세기에만도 40 여년의 공을 들여, 제주도에서부터 만주, 요동, 심지어는 산동반도까지의 통일을 이루었는데 비해,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킴으로 써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넓은 만주대륙을 중국에게 넘겨 줄 계기 를 만들고 말았다. 사실 그 당시에는 중공이 많이 약했다. 중공이 국가로 선포된 해는 1949 년도였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보다도 더 늦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일 년 전 쯔음에 서야 겨우 중공이 나라로 선포되었을 뿐이었다. 즉 중공은 별 힘이 없는 셈이기도 했는데, 소련에서 공부한 그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전쟁으로 인하여 얻은 것은 무엇인가? 없다. 잃은 것이 월등하게 많은 전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까지 끌어 들임으로써 소련으로부터 그 만주대륙을 중공에게로 넘겨주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 다. 만주에는 동북삼성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흑룡강성은 남한 면적에 약 7배다. 만주에는 그 외에도 성이 두 개나 더 있다. 지하자원도 매우 많다. 바로 그 대지를 누릴 수 있었던 시기가 선교사들의 활동기였다.

더러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말을 한다. 선교사들은 교육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일제시대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만 들었던 세례문답서와 오늘날의 교리문답서는 게임이 안 된다고 한다. 당연히 일제시대의 교 리문답서가 더 훌륭하다. 통계의 정확도나 재정의 투명성, 그리고 신앙의 철저성에 있어서 본다면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는 일제시대 기독교의 내용보다 못할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 날 문명이 이렇게 발달되고,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많으며, 오늘날 경제가 이토록 성장했는 데, 설마? 우리가 일제시대 혹은 한국 초기 기독교보다는 수준이 높지 않겠는가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유명한 한 교회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에 해 준 게 뭐냐라고 묻는다면, 그는 ‘해방’이라고 말한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여성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인권유린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를 덧붙여 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조선시대의 왜곡된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즉 한국 기 독교회는 낙관론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한국 기독교회는 마침내 우리에게 ‘대지’ 를 알려주었다. 즉 만주와 한반도와의 통일을 알려주었던 셈이다. 유명한 과학철학자 화이 트헤드는 인류 문명의 3대요소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상업의 확대, 둘째, 기술의 발전, 셋째, 비어있는 대륙의 발견이다. 조선 말 한반도는 바로 이 세 가지를 갖추어 가던 단계였다. 특히 만주라는 비어있는 대지를 알았다. 그 당시에는 확장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한국에서는 개신교회라는 새로운 파라다임이 개척되고 있었다. 물 론 그 시대의 기독교는 오늘날의 기독교처럼 주술 화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 때의 기독교 에는 철저성이 있었다. 투명성과 정직성이 있어야 기독교로 인으로의 전입이 가능하였다. 세례도 함부로 베풀지 않았다. 치리의 사례는 매우 많았다. 내한 선교사들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그 때에는 꿈을 꿀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 회는 어떠한가? 잊혀 진 기억이 무엇인지 확인이라도 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는 그 자체 안의 문제만 해도 허덕일 지경이다. 신학교와 교회와 의 괴리도 심하다. 역사의 뿌리도 잘 모르고 있지만 문제의 원인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 례들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아니, 과거에 있었던 희망 마저도 스스로 버렸다. 과연 한국교회는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가졌던 희망을 이루었을까? 길선주 목사님의 주장 중에는 ‘해타론’이 있는데, 게으름이야 말로 가장 나쁜 죄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너무도 열심히 일하고 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또한 기 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있던 민 왕후는 미국 선교사들과 돈돈한 관계를 가졌다. 이것만 본다 면 한국은 조선말의 희망을 많이 이루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통일과 대지와 역사’다. 유독 이 부분에서 만큼은 말도 못할 만큼, 삽시 간 만에상상도 하지못할 만큼의큰 손해를보았다. 단지 이것을국가 정책상의문제만으 로 돌릴 수 있을까? 그 당시의 한국기독교는 엄청난 일을 했는데, 왜 유독 우리는 분단을 당하고 말았을까?왜 하필 2차 대전때 쓰고 남은무기 쓰레기들을 한반도에버려야 했을 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을 교회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확장으로 부르기보다는 ‘수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즉 옛 날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위 오늘날 말하는 ‘한류 열풍’은 고대의 영광이나 1900년대 초·중반의 낙관론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본질을 찾는 것이 무엇보 다 중요하다. 원래 우리 것인데, 잃어버렸기 때문에 찾아야 한다. 그러면 왜 그 중요한 것들 을 잃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번 학기에는 바로 이 질문을 화두로 하여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