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사상사

 

제2강 민족의 무의식과 대지의 신학(Ⅰ·Ⅱ)




Ⅰ. 여호수아 23장 3-8절을 통해 본 대지(大地)



   러시아의 문호 피요트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옙스키가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로샤에게는 존경받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수도사요, 당대에 뭇사람들로부터 한끝 존경을 받던 조시마 노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성인의 시체는 썩지 않는다.” “어느 수도원의 유명한 수도사도 죽었을 때에 그 사체가 썩지 않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내심 수도원 원장인 조시마를 주시했습니다. “어느 수도사도 그 사체가 썩지 않았다는데 이토록 위대하신 조시마 수도사야 말로 정말 시체가 썩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조시마가 사랑하는 제자 알로샤 역시도 속으로는 은근히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장인 조시마는 많은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전하고 난 뒤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의 주검 앞에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조시마의 시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디선가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시마의 시신 곁에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그러니까 시신에서부터 악취가 진동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의 사랑하는 제자이었던 알로샤는 그만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왜요? 자기 스승처럼 위대하고 유명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대(大)수도사가 썩어서 악취를 풍긴다는 것이 그로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알로샤는 그만 수도원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밖에서도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조시마의 제자 알로샤를 만난 사람들은 조시마를 비난하였습니다. 평소에는 말이 없던 사람들조차도 조시마 수도사의 악취 소식을 듣자, 그를 비난하고, 비판했습니다. 심지어는 무식한 사람들조차도 한 마디씩 보탰습니다.

   알로샤는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스승인 조시마의 시신 앞에 섰습니다. 거기서 알로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밤이 깊도록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깊이 몰두해 있었습니다. 스승과의 추억들, 스승의 가르침들, 그가 겪었던 갖가지 사건들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그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알로샤는 꿈을 꾸게 되는데 그는 꿈에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조시마의 시신 앞에 선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견딜 수가 없어,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는 마치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놀라움, 즉 전율을 경험합니다. 그야말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알로샤는 대지(大地)를 안고 싶은 충동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눈물로 대지를 적시었습니다. 그는 대지에 입 맞추고 싶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짐했습니다. “영원히 대지(大地)를 사랑하겠노라.” 그 순간 알로샤는 땅에 엎드리어 입 맞추었습니다. 알로샤는 일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수도를 하던 알로샤가 진리를 깨달은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미국의 문학가인 펄벅이라는 사람은 [대지]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학가인 박경리 선생께서는 [토지]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사실 펄벅이 쓴 대지는 그 배경이 청나라입니다. ‘청’이라는 이름은 우리와는 관계가 깊기 때문에 사실 [대지]라는 소설은 우리나라 사람이 썼으면 좋았을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미국 사람이 써 버렸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아이신죠로 푸이의 일화를 다룬 영화 [마지막 황제]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지마는 그 영화는 서양 사람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푸이의 일화가 왜? 우리 역사의 일부냐구요? 만주 제국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장님처럼 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경제’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 ‘경제’라는 말의 뿌리인 그리이스 말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의 경세’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삽니까? 

   ‘대지(大地)’란 단순히 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중동의 척박한 땅은 ‘검은 금(black gold)’이라고 하는 석유를 내뿜어 그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넓은 땅은 많은 양떼를 기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카나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큰 땅이 백성에게 여유를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분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늘로부터 어떤 복된 약속을 받았습니까?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약속한 땅에 들어 간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습니다마는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고, 그 후세대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나온 1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복 받은 사람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에 대해서는 여호수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싸움을 통해 점령하면서 들어가 땅을 차지합니다. 결국 거의 다 차지하게 되고, 그 땅은 지파별로 나눕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들어가 땅 뒤집고 산 게 아니라 지파별로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나머지까지도 다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호수아 23장 3-8절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훈계로써 유언의 성격을 띱니다. 그럼 3절부터 8절까지 한절씩 풀어 보겠습니다.


   3절: 하나님께서 싸워 주셨음을 일러줍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순전히 자기들의 힘만 믿고 있었더라면 아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 죽었을 것입니다. 대적들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심히 위험했지만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신 연고로 기꺼이 이기게 하셨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4절: “해지는 편, 대해”는 오늘날의 지중해입니다. 지도를 떠올리면 이스라엘이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다 차지하였으며, 아직 덜 차지한 곳도 백성에게 제비뽑아 나누겠다는 뜻입니다.

   5절: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적들을 쫓아내시어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그 땅을 너희가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6절: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계명을 지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7절: 풀이해보면 “아직 여러분과 함께 남아 있는 민족들과 섞이지 마시오. 그들의 신의 이름을 불러 맹세하지도 말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지도 마시오.” 그러니까 이방인들 하고 섞이지도 말고, 그들의 종교관습을 따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8절: 하나님 섬기는 데 변함없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읽은 본문의 요지를 말하자면 ‘하나님을 잘 믿고, 주신 땅을 기업으로 받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마지막 훈계입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어떻게 보십니까? 실지로 구약 성경에서 줄곧 적지 않게 말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신을, 그러니까 이웃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의 신을 믿다가는 망하게 된다는 것을 줄기차게 보여줍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나 하면 유대인들은 제국에게 망하게 됩니다. 그 까닭에 대해서 성경은 설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방신을 섬기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그래서 성경 여호수아서는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만을 섬겨야 산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그들의 힘은 훈련된 군인들한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들의 힘은 기름진 땅에서 나는 소산물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인구가 많은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들의 힘은 하나님을 믿는데 있었습니다. ‘무얼 믿나?’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작전 사령관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이 친히 전술을 일러 주시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음을 사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으로 망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해야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 합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그 교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게 됩니다. 유대교는 유대 민족적 종교인데 비해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보편 종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활동을 하셨지만 그 분의 복음은 유대교 안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좀 더 말씀드리면 유대인들은 사실 떠내기 민족입니다. 원래 그들의 고백대로 볼 때, 이집트의 노예로 있다가 가나안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땅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돌아오기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살필 때 우리는 성경에 견주어 주변의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우선 성경은 땅을 사고팔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그 까닭은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임의로 거래할 수 없다고 레위기에서 밝힙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 이르기를,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몇 가지를 살피겠습니다. 

   세계에서 땅값이 가장 비산 곳은 어디라 여기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일본과 홍콩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땅은 넓고 기름집니까? 아닙니다. 그 땅에는 쓸 만한 자원이 많이 묻혀 있기라도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사기는 오지게도 비삽니다. 집값이 상대적으로 산 나라 가운데 하나로 저는 카나다를 알고 있습니다. 카나다는 인구에 비해 땅이 얼마나 넓은지 나라전체가 마치 거대한 공원과 같습니다. 미국 역시 매우 기름진 곳입니다. 

   그래서 카나다와 미국에 속했던 어메리카 원주민들의 생활상에 대해 잠시 살펴봤습니다. 놀랍게도 어메리카의 원주민들은 땅을 돈으로 사거나 팔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어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수와미족의 추장이었던 시애틀 씨가 1855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피어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워싱톤에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 땅을 사고 싶다고 요청을 해왔습니다.(중략) 어떻게 당신은 하늘을, 땅을, 체온을 사고 팔 수가 있습니까? 이 땅의 구석구석은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합니다. 저 빛나는 솔잎들이며, 해변의 모래톱, 이미 어두침침한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은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 성스러운 것들입니다. 당신들은 밤중에 우리 땅에 와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땅은 그들의 형제가 아니라 적입니다. 그들은 땅을 정복하면 그곳에 이주합니다. 그들의 왕성한 식욕은 대지를 마구 먹어치운 다음에 그것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라고 했습니다. 즉, 백인들이 들어가기 전 어메리카에 살았던 원주민들은 땅을 하나의 생명체요, 형제로 여겼습니다. 즉 어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은 그토록 넓은 땅을 누비며 살았지만 그 땅을 사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땅과 들소와 갖가지 생명체들을 형제로, 신성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여호수아서의 교훈은 땅을 차지할 때에는 반드시 해결하고 들어가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즉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안 될 때에는 땅을 차지해도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 점을 아주 뚜렷이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고대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간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를 곧장 가면 15일 정도면 도착할 거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무려 40 여년이나 돌아다닙니다.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세대가 바뀌어서야 비로소 들어가게 됩니다. 예외적으로, 출애굽 한 1세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졌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나머지는 대부분이 광야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습니다. 이게 무얼 뜻한다고 보십니까? 땅은 함부로 주어지지 않으며, 아무한테나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구약의 히브리 민족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고, 새 나라를 세울 백성에게는 그 새 나라에 어울리는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강조한 본문 가운데 하나가 오늘 읽은 여호수아의 훈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 받습니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요사이보면 현란합니다. 복잡합니다. 사기군도 많고, 바쁜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중심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성경은 그 중심을 하나님께 두라고 합니다. 참으로 성경은 놀랍습니다. 어떤 제도나 훌륭한 사람이나 돈이나 땅이나 군인이나 무기 같은 것에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Ⅱ. 라인홀드 니부어의 글에 견주어 본 문명과 대지


   라인홀드 니부어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인용 1) 야만주의는 계급구별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계급은 문명에 의해 생겨나고 더욱 고도로 세련된 것이다.(중략) 이 차별들은 항상 보다 더 복잡한 문명들과 보다 큰 사회 단위들에서 발전된,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힘의 불균등에 의해 규정된다. 성장하는 사회적 지성은 이것들에 의해 모욕을 당할 수도 또 이것들에 맞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 차별에 대해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회의 불의에 항거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이집트 및 바빌로니아의 사회적 이상주의자들은 공평한 사회에 대한 그들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권력층은, 설사 그들이 인도주의적인 충동에 눈을 뜨는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항상 먹이를 노리는 야수로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의 가정에서 관대할 수도 있고 또한 권력과 특권을 함께 누리고 있는 집단의 범위 내에서는 관용스러울 수도 있다.(중략) 권력층의 이 같은 박애주의는 우리가 인간의 행동에서 발견하는 야수의 도덕성과 기묘한 결합체의 완벽한 본보기이다(라인홀드 니부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이한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2), 31).


(인용 2) 그러나 민주주의의 신조와 제도들은 결코 이것들을 배태하고 발전시켰던 상인(商人)계급의 특수한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적은 한 번도 없다(니부어, 같은 책, 32).


(인용 3) 쇼팬하우어는 종교적 금욕주의를 “생에의 의지에 대한 부정”이라고 아주 올바르게 해석했다(니부어, 같은 책, 69).


(인용 4) 이기적 욕망을 생애의 의지에서 분리해내지 못한 기독교와 불교의 금욕주의자들은 욕망을 절멸시키려 하다가 단지 완전한 육체적 절멸만을 중단했을 뿐이다(니부어, 같은 책, 71).


(인용 5) 종교가 천년 왕국을 현세적인 용어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유대의 천재적인 종교사상 덕택이다. 신의 왕국에 대한 복음서의 견해는 다분히 제2이사야의 환상에서 빌려온 유대교의 메시아 왕국에의 소망을 고도로 정신 화 한 것이다.(중략) 완전히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현대의 공산주의자들의 꿈은 고전적인 종교적 환상의 세속화 된, 하지만 여전히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꿈이다.(중략) 공산주의는 점진적이고 불가피하게 진화적인 과정에 의해 출현하는 새로운 사회를 무시한다. 또한 공산주의자는 현재 사회의 흐름에 대해 비관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재앙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절망에서 희망이 생겨나며, 재앙으로부터 새로운 사회가 출현한다고 본다(니부어, 같은 책, 77).


(인용 6)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란 그리스공화국에서의 노예 소유주들이 누렸던 자유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레닌의 언명은 이를 변형시킴으로써만 대답될 수 있다(니부어, 같은 책, 163).


   위의 인용 1을 볼 때 도덕이나 이성(理性)은 이익에 앞선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실지로 니부어는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이성이 이익에 앞서기 힘들며, 특히 집단의 이익에 앞서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언명합니다. 아울러 “계급은 문명에 의해 생겨나고 더욱 고도로 세련된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평등은 반(反)문명적 패러다임에서 보다 잘 드러나는 특징이라는 점입니다. 이와 견줄 때 성경의 평등이나 이상은 실제 현실에서 두드러지지 않았을 지라도 반문명적 패러다임의 상황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문명을 지향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성경의 공동체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문명을 지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도시화와 결별되어야 땅에서 보다 잘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하늘나라의 모습은 마치 세상에 있던 어느 왕궁의 모습과 유사한 듯도 한데, 그렇다고 해서 초기 기독교가 왕정을 추구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세상의 왕권과는 다른 것을 추구했을 것으로 여깁니다.


   이와 좀 다른 상황이기는 하지만 인용 3과 4에 나타나는 종교적 금욕은 성경과는 그다지 친근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금욕은 고대 그리이스의 스토아학파와 견줄 만하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레네 학파와의 공통점은 육체를 귀중히 여기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예수님의 정신과는 가깝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의 수도원 운동과는 어떻게 결별 될 수 있는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혜셀이 쓴 [예언자들] 2권에서 주장하는 예언자적 영성은 스토아적 금욕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아주 큰 역설적 상황은 문명화의 한 가운데에서 성경의 정신을 말하고 있으며 종말론이나 새로운 공동체나 새로운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는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만들기에는 제한이 따를 것으로 보입니다. 

   니부어가 “야만주의”라고 부른 것은 고대의 원시사회와 견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구약성경은 원시사회의 이상을 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사회는 구약성경과 같이 이상을 그리는 고전(古典)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같은 책을 찾는다 해도 또는 환단고기를 찾아도 공동체나 세계의 이상을 그린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찾아보자면 한자(漢字)로 쓰여 진 추상적이고 어찌 보면 농경적인 것 같고, 아주 짧게 4음절로 된 “홍익인간” “재세이화”라는 정도의 말들이 나오는 듯합니다. 이런 것은 고대 히브리 공동체와 히브리 예언자들이 주장한 이상에는 견주기 어려운 듯 보입니다. 더군다나 한반도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규명은 어렵겠지만 한자(漢字)를 공용화하고 북쪽의 만주 대륙 사람들의 문화와 강하게 결별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반도 사람들의 동북아 구상론은 그 출발에서부터 문제가 있었거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만주나 시베리아를 밟으려면 그에 어울리는 구상을 갖고 접근하지 않는 한, 그리고 대지(大地)를 창조한 신(神)의 허락을 받지 못하는 한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일찍이 한반도와는 달리 신화화(神話化)의 길을 간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경우도 20세기에 서구 문명의 도움을 얻어 대동아 공영권까지 이루었으나 그 일은 단 8일 가량 참전한 러시아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20세기에 만도 40 여년 공들인 일본의 그 일이 불과 8일 참전한 사람들에 의해 무산될 정도였다면 대지는 결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뚜렷한 것은 남한과 일본에는 고속철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면적에 16∼17배의 영토를 갖고 인구 300만 가량이 사는 몽골 공화국에는 고속철이 없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면적에 78배라고 하는 러시아에서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새마을호보다 늦게 달리는 기차가 아주 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러시아는 20세기까지도 농경사회였습니다. 

   반면, 미국은 브리타니아가 실현한 산업화와 이성과 문명과 전쟁과 식민주의와 원주민 학살과 갖가지 특징들을 다 안고 세워진 나라로 여겨집니다. 물론 그 넓은 땅(大地)에 살던 원주민들은 싹쓸이 하고, 늑대도 싹쓸이 하고, 들소도 싹쓸이 하다시피 하고, 자연파괴도 했다면 한 듯하고, 큰 도시와 인류현대문명의 총합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이 추구한 곳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흑인 노예의 유입과 그 노예해방이후 들어간 각양각색의 유색인종들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도 이민문제와 인종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라인 듯합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세계 인종 전시장이요, 이민의 나라입니다. 물론 그 나라의 기반은 원주민 학살과 동물 살해에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는 구약성경의 정신과는 너무나 떨어져 있을 것이 뻔합니다. 특히 잡종(인종전시장)적 현실은 신명기 역사서가 아주 문제시 한, 다시 말해 혈통의 보존과 유전자 보존의 창조질서에서 볼 때, 근본적 유죄요, 성경이 보여주는 우상숭배(바알종교는 곡물종교인데, 풍요와 다산을 추구합니다. 이는 자본의 효율성과 생산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의 생산 논리와 견줄 만하다 여겨집니다)의 전형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사상과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대지를 밟아서 안 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지의 파멸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백성은 대지를 밟을 자격이 있는가? 입니다. 이를 조금 달리 표현하면 그토록 만주를 그리워했을 한반도의 조상들과 만주를 그리워하는 한반도의 현 시대 사람들 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인들은 “만주, 요동, 요서”라는 대지를 밟지 못하고 고속철까지 달리고 비행기까지 타는 이 시대에 휴전선조차도 넘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게 ‘대지를 창조한 신의 질서에 합당한 습관’을 가지지 못해서라고 봅니다. 현재 남한 사람들의 생각으로 대지를 밟다가는 재앙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 고대부터 문명을 꽃 피웠던 부여족은 끊임없이 지나족에게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비족(거란)의 배신으로 그들은 대지를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발해 역시 선비족(거란)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다시 말해 문명을 알던 부여족은 야만족에 의해 크게 공격을 받고 그들의 대지를 양보(?)하여 그 대지에서 쫓겨났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과연 한반도 사람들이 대지를 밟을 만한 에도스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역시 한반도에 살았던 조상들의 전철을 조금 다른 형태로 답습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말해 이토록 교통이 발달한 시대에 우리는 말 타던 시대 보다 훨씬 더 비좁은 영토에서 비행기에 고속철까지 타고 다닌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걸어 다니거나 말 타던 옛 사람들은 대지를 밟고, 대지가 주는 혜택을 받으며, 대지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결코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필연입니다. 물론 논리적 근거를 대라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사실이었습니다.


   인용 3, 4, 5에 견줄 때 우리는 종교와 야만주의와의 관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니부어는 그의 책에서 종교적 사제 그룹 역시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갖고, 소유를 갖는 지배 계급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운동가가 금욕이나 미덕을 말 할 때, 이는 얼마나 문명이라는 파라다임 속에서 반문명적 정신을 끌어들일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스토아적 금욕과 수도원 운동으로 신학적 사고나 수행의 언어를 사회를 향해 내놓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본질적으로 원시사회의 이상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하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에 있는 이른 바 성직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대지에 대해 언어를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저는 감히 “NO”라고 답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보다 월등히 불편하게 살았을 중세 한반도의 승려들(사제들)도 대지를 마음 놓고 밟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근대식 선교(missions)의 야망으로 대지를 누리겠다는 것은 자위행위 이상을 넘어서기 힘들 것으로 여겨집니다. 

   니부어는 그의 책에서 경제 문제도 다루었는데,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열린 우리당은 한나라당으로부터 “경제”라는 단어로 적지 않게 딴죽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의 인용문에 드러난 대로 문명화와 계층의 가중화에 따른 성장 논리와 결별 될 수 없고, 이런 논리에 있어서는 어쩌면 한나라당이 우위를 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그런 논리를 자주 쓰는 것은 그 논리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 일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이에 맞섰던 그 당시 여당의 주장이 그냥 도덕적인 우위만을 말했다면 니부어가 지적한 논리대로 할 때에는 참패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 1에 나온 것처럼 “권력층은, 설사 그들이 인도주의적인 충동에 눈을 뜨는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항상 먹이를 노리는 야수로서 남아 있기 마련이다.”라는 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리되면 야당이나 여당 모두 이익집단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이익집단 적이고, 문명적 체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것과 유사하게, 대지를 밟을 특권을 신으로부터 부여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이럴 때 쓰는 “동북아 중심 국가”론이나 “동북아 경제 중심”론이나 “동북아 허브” 같은 소리는 내부단속용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왕씨가 세운 고려 때에도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고려 시대 때 한반도 사람들이 습관(에도스)을 바꾸어 여진족에게 항복을 했더라도 통일의 가능성은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그 어떤 결단도 없었을 고려나 조선의 국가 양태를 감안할 때 과연 현대 한반도 사람들이 대지를 밟을 특권을 신으로부터 부여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대지가 쉽게 허락되지 않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할 때 40년 광야생활 이후에나 가능했다는 것은 그들의 습관이 대지를 밟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 고대의 가나안 사람들은 정착한 히브리인들을 향하여 “경제논리” “정치논리” “군사논리” “성 쌓는 방법” “생산의 효율성” 등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 상 8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그가 너희 아들을 취하여 그 병거의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너희 아들들로(중략) 자기 밭을 갈고(중략) 추수하게 할 것이며(중략)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중략)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중략)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중략)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삼상 8 : 11-19). 


   위의 인용문은 왕정(王政)이 가져다 줄 폐해를 알려줍니다. 아울러 왕정은 문명적 직제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는 야훼하나님의 다스림이나 야훼하나님의 질서가 아님을 뜻합니다. 

   이사야서의 새 세계를 향한 이상은 원시사회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아가 이는 우리가 도시화 된 사회에 살면서 땅을 만드신 신의 뜻을 받들어 그 분의 숨결(Ruach)을 느껴야 하는 것과 동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