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사상사

 

   제5강  내세에서 혼백의 소멸로: 국조숭배에서 성현 숭배로




   고려 말까지 한국인들은 내세관을 가졌습니다. 이는 사후(死後)의 세계를 믿었거나 인과율에 의한 윤회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에 중요한 변화를 주게 되는 계기가 생깁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교 식 제례관(祭禮觀)입니다. 즉 고대에는 불멸할 것으로 여겼던 영혼(靈魂)이 한정적으로 제한됩니다. 소위 ‘혼·백·귀(魂·帛·鬼)’라는 존재자들이 일정시간 공간을 떠돌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소멸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대략 5대 정도까지 제사를 지내면 됩니다. 물론 이는 영혼(靈魂)이 불멸(不滅)할 거라는 고대의 신앙이나 계세사상(繼世思想)이나 전생(前生)을 주장하는 윤회적(輪廻的) 내세관(來世觀)과는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제례관은 사상적으로는 혁신이나 개혁에 버금갈 만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오직 죽은 사람을 장송(葬送)하는 것만이 큰일에 해당한다.” 하였는데, 대저 죽음이란 것은 친(親)의 끝남이요, 인도(人道)의 커다란 변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은 이 일을 신중히 생각하여 상제(喪制)를 만들어 천하에 알려 천하의 자식 된 사람으로 하여금 대대로 이것을 지키게 하였다.


승냥이나 수달도 모두 제 근본에 대한 보답을 아는데, 요즘 사대부들은 대부분 이것을 소홀히 여겨, 산 사람을 봉양하는 데는 후하나 선조를 제사하는 데는 박하니, 이것은 매우 옳지 않다. 무릇 죽은 사람을 섬기는 예는 산 사람을 섬기는 예보다 후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 대한 예(禮)를 강조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려 시대라고 하여 죽은 사람들을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대부들이 자기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소홀히 한 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정도전은 맹자의 주장을 빌려, “오직 죽은 사람을 장송(葬送)하는 것만이 큰일에 해당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을 어떻게 장송하여야 할 까요?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통곡하고 울부짖으며 땅을 치고 발을 구르는 것은 정의 변화인 것이요, 초빈을 하고는 죽을 먹고 우제(虞祭)를 지내고는 소사(蔬食)와 채갱(菜羹)을 먹으며 상제(祥祭)를 지내고는 채과(菜菓)를 먹는 것은 음식의 변화인 것이요, 단괄(袒括)을 하고 재최를 입는 것은 의복의 변화인 것이요, 흙덩이를 베고 거적자리를 깔고 자며 외실에 거처하고 내실에 들지 않는 것은 거처의 변화인 것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사랑하는 정은 이렇게 하면 지극한 것이다.(중략) 근세 이래로 상제가 크게 무너져서 으레 불교 의식으로 행하게 되는데, 초상을 당하여 아직 매장도 하기 전에 진수성찬을 낭자하게 차리고, 종과 북소리를 떠들썩하게 울려 대며, 남녀가 뒤섞여서 웅성되는가하면, 상주되는 이는 오직 손님접대가 불충분할 것만을 염려하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죽음을 슬퍼하겠는가?  


   즉 정도전은 고려 시대의 사람들이 죽은 자를 홀대한다고 여긴 듯합니다. 그래서 정도전은 죽은 이들에게 최대한 예를 표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정도전이 죽은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후손들이 복(福)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군요. 또한 죽은 자들이 어디를 가 있는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주장도 아니군요. 다만 자식들이 죽은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논어]에서는 어떻게 주장할 까요? [논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 하였습니다:


계로(季路)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직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감히 죽음에 대해 묻겠습니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아직 사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이는 공자(孔子)의 내세관에 대한 견해를 말 할 때 종종 언급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기록만 있지는 않습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습니다:


번지(樊遲)가 지혜가 무엇인지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행해야 할 옳은 일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다. 다시 인(仁)이 무엇인지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인을 아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은 뒤로 하니, 그러면 인(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따르면 공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자는 죽은 조상도 인정한 듯합니다:


임금이 먹을 것을 내려주면 반드시 자리를 바르게 한 다음 먼저 맛을 보시었고, 임금이 날 것을 내려주면 반드시 익혀서 조상에게 먼저 올리셨고, 임금이 산 것을 내려주면 반드시 기르셨다.


   여기서도 조상을 인정하는 군요. 그러나 개념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공자가 영혼불멸적인지, 구천을 떠도는 존재자들을 인정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공자도 그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중국의 죽음관과는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어쨌든 죽은 조상이 후손들에게 복을 베푼다거나 후손들에게 화를 미친다는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무언가가 섞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제사를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처럼 여겼으며, 더러는 죽은 조상이 후손들에게 복을 베푸는 것처럼 이해하기도 하였으니까요. 

   정도전은 종묘(宗廟)에 대해서도 주장을 했습니다:


제사는 국가의 대사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먼저 종묘(宗廟)를 세우고, 다음에 사직(社稷)을 세운다.(중략) 종묘사직만이 아니라 풍(風)·운(雲)·뇌(雷)·우(弓)에 관한 제사와 성황(城隍)·악독(岳瀆)에 관한 제사도 각각 그 처소가 있어서 완전하게 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신령의 아름다운 가호에 보답하기 위한 뜻이 과연 어떠한가?


   이를 따르면 정도전은 국가제사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제사도 인정하였군요. 특히 ‘성황(城隍)과 악독(岳瀆)’에 대한 제사까지 인정한 것을 보면 민간신앙까지도 긍정하였습니다. 불교의 미신적 요소는 그리도 비판하던 정도전이 민간신앙이나 신령에 대해서는 관대 하군요. 그렇다면 정도전이 말한 종묘란 무엇일 까요? 그것은 나라를 세운이의 조상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직은 무엇 일 까요?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社)라는 것은 토신(土神)이고, 직(稷)이라는 것은 곡신(穀神)이다. 대개 사람이란 토지가 없으면 존립할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거 웬일입니까? 보면 볼수록 정도전은 범신론자(汎神論者)같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그리도 비판적이었던 사람이 민간신앙이나 대지(大地)에 대해서는 관대하였군요. 그러니까 정도전은 불교가 유독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도전을 무신론자나 비(非)종교주의자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는 단지 고려의 건국이념이었던 불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조선의 종묘가 고대의 주몽이나 온조나 혁거세를 기릴 까요? 당연히 그럴 리가 없겠지요. 만일 조선이 종묘를 세운다면 이는 이성계를 기리거나 이자춘을 기려야 하겠군요. 그러나 이자춘에게는 ‘고대국가의 영광’이라는 명분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왕건은 ‘고려’라는 이름을 씀으로 고대의 고구려를 어떤 식으로든 계승하고 싶어 하였지만 이성계의 조선은 이와 달랐습니다.     

전호태 박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5세기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적 천하의식의 성립과 전개이다. 전통적 동명신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이 고구려 중심의 천하의식은 5세기를 전후로 고구려에 편입된 새로운 영토 지배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 해준다. 뿐만 아니라 왕권의 신성성, 혹은 초월성을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왕은 천제지자(天帝之子)이며 일월지자(日月之子)인 동명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이러한 의식은 5세기의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힘과 지위에 의해 보다 확고히 고구려 사회 안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중략) 국가 제의의 체계화와 주몽 신앙의 확산을 들 수 있다.(중략) 왕권의 신성성과 초월성이 불교 교리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 즉 현세의 왕권을 숙세인연(宿世因緣)의 과보로 이해하고, 나아가 왕은 ‘여래의 절대적 권위를 현세에서 구현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주장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광개토왕비문에는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승천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고대 고구려의 제례관에는 국조(國祖)에 대한 예(禮)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국조라는 것이 조선시대의 국조와는 차이가 큽니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국조는 부여와 맞서면서 갖은 시련을 이겨내고,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고구려는 자신들을 ‘천하(天下)의 중심’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중국에게 의존하여 원수(元首)의 칭호도 ‘전하’로 낮추어 불렀을 뿐만 아니라 명(明)나라의 인준을 중요시하는 외세의존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 조선은 고대의 고구려에 비할 때, 형편없이 약한 기상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선교(仙敎)와 불교(佛敎)와의 혼합적 내세관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유교적 사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중세기 왕건이 세운 고려만 해도 불교를 중요 시 하였기 때문에 작더라도 고대 고구려의 종교적 세계관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남겨 두었을 텐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급선회 합니다. 즉 고대의 세계관으로부터 이탈한 셈입니다. 이는 종교나 제의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물론 조선의 유교적 제의에서도 종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묘라는 것이 고대의 주몽신앙과는 차이가 큽니다. 고구려는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조선은 철저하게 명(明: china)나라에 대한 사대성(事大性)을 가졌습니다. 얼핏 보면 이름이 ‘조선(朝鮮)’이기 때문에 마치 고대의 ‘고조선(古朝鮮)’을 연상케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고대의 고조선과는 판이(判異)합니다. 더군다나 고조선의 종교는 ‘유교(儒敎)’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이성계의 조선은 국조(國祖)대신에 성현(聖賢)을 모셔오게 되는데, 그 성현이란 중국의 성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는 만동묘에 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관우에 대한 제사도 지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송시열은 “조선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도 명(明) 황제의 은덕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종교관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차이는 고대에 널리 퍼져있었던 내세적 세계관을 유교적 한시관(限時觀)으로 바꾼 데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고대의 동명왕이나 혁거세 대신에 중국의 성현을 섬기게 되었고, 고대에 널리 퍼져있었던 내세관 대신에 유교적 한시관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종묘(宗廟)가 있었지만 그 종묘는 고대 고구려의 국조(國祖)신앙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성계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조선’이지만 [朝鮮經國典(조선경국전)]을 쓴 삼봉 정도전의 제례관(祭禮觀)은 단군(檀君)보다 공자(孔子)가 더 두드러집니다.   조선시대의 제의(祭儀)를 단적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시대의 제의적 특성을 요약한다면, 저는 “내세관(來世觀)에서 혼백(魂帛)의 소멸로: 국조숭배에서 성현 숭배로 바뀌었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19세기경에 내한(來韓)한 개신교의 내세관은 무엇이었을 까요? 과연 유교적이었을 까요? 당연히 그럴 리는 없습니다. 내한 선교사 언더우드는 특별히 한반도의 서북지방을 지목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곳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때 지독히도 소외되었던 지역이었습니다. 소위 기호학파나 영남학파라는 정치적 중심지와는 전혀 다른 곳을 언더우드는 지목합니다.    


당연히 한반도의 서북지역이 유가철학(儒家哲學)으로는 중심지였을 리가 없겠지요. 아주 놀랍게도 1907년 독립노회와 191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총회는 모두 평양에서 창립되었습니다. 그 곳은 옛 고구려가 한 때나마 도읍을 정하였던 곳입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의 선각자들은 도교적 성향이 강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소외지역이었던 평안도가 개신교를 통하여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중심이 되었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 있어서 예수교 장로회의 성지(聖地)는 평안도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