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장 연구실
II. 누가 자식이 떡을 달라 하면
1.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동적이고 공간적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역사 속에 서 히브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지하였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시편 84년 2절에서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라고 토로한다. 이렇듯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의식이 마음 깊이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할 때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대제사장도,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예수님을 심문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항상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분’으로 인지하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유대인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개정)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하나님을 의미하는가? 즉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시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히브리인의 신앙의식 속에는, ‘하나님은 현존해 계시는 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고난 속에서 부르짖을 때,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모양으로든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신적 존재를 의심하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1)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말씀은 그분이 행하시는 일(활동)으로 입증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의 최초의 신앙고백인 신명기 26장 5-9절에서, - 앞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7-9)라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롤리H.H.Rowly는 다음과 같이 구약의 하나님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구약의 사상은 하나님 안에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체험의 하나님이시지, 사유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톤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히브리인의 신앙’이 히브리인 인지구조, 곧 신앙의 특성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히브리인의 시인은,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 개정)고 생각한다고 증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자는 악인이고, 어리석은 자이고, 마음이 부패한 자이다.(참조. 시 53:1; 45:14) 그래서 밀톤은 “하나님께서 심판과 구원을 통해 오늘도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신다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시는가? 그것은 ‘창조활동’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창조기사’를 성경의 맨 앞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2.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현대 종교사학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靈)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성경의 창조기사를 메소포타미아의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기록된 ‘창조설화’와 비교하여 우주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에누마 엘리쉬’에 나타난 ‘우주개벽설’에 의하면, 원초적인 커다란 궁창에 있는 혼돈의 여신 ‘티아맛(Tiamat)’과 그녀의 남편 강물의 신(神), ‘압수Apsu’는 안면과 정적의 고요를 방해하는 여러 신들(혹은 그들의 ‘자녀’로 해석되기도 함)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사실을 알아 챈 신(神), ‘이아Ea’는 주문을 외위 ‘티아맛’의 남편 ‘압수’를 잠들게 한 후, 그를 죽여 버린다. 그러나 ‘티아맛’은 새 남편 ‘킹구Kingu’를 얻어 ‘이아’에 대항한다. 그러자 ‘이아’의 아들 ‘마르둑Marduk’이 신들의 회에서 차기(次期) 왕이 되리라는 보장을 받고, 구름수레와 번개 알, 활, 그리고 마술 망방이 등을 가지고 나아가 ‘티아맛’과 대결하여 그녀를 살해한다.: “그 때 마르둑은 화살을 쏘았고, 그것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 마르둑은 티아맛을 꼼짝 못하게 한 후 그녀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마르둑’은 ‘티아맛’의 커다란 시체를 두 동강이 내어 하늘을 가리는 천정(하늘의 궁창)을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로는 땅 밑의 물(궁창)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아래 궁창(물)위에 땅이 놓이게 된다. 그 후 ‘마르둑’은 ‘티아맛’의 새 남편 ‘킹구’를 붙잡아 살해한 후, 그의 피를 진흙과 섞어서 ‘인간’을 만든다: “나는 피를 한 덩어리로 뭉쳐 뼈가 되게 하겠다. 나는 사나운 놈을 만들어, 그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겠다. 정말 사나운 사람을 창조 하겠다 … ” 그리고 ‘창조된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을 섬기게 한다.
이상 ‘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바벨론 창조설화’와 성경의 ‘창조기사’와의 유사점을 찾으려고 종교사학파의 여러 신학자들이 시도하였다. 그들은 ‘바벨론 창조설화’와 ‘성경의 창조기사’에서 ‘물의 혼돈’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들은 ‘물의 혼돈’을 바벨론 창조설화에서는 ‘티아맛Tiamat’으로 표현되었고, 히브리 창조기사에서는 ‘테홈Tehom’이라고 표현되었다고 이해한다. 특히 ‘테홈’이 정관사 없이 표현되었다는 것은, ‘인격화된 단어’라고 그들은 이해한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현대 종교사학자들의 몇몇 신학자들은 성경의 창조기사, 곧 히브리인들의 창조기사가 바벨론 ‘에누마 엘리쉬’ 창조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에무나 엘리쉬’는 바빌론이나 수메르 우주개벽설이 아니라, 오히려 어지럽게 얽혀 있는 여러 전승의 혼합에 불과하다고 람베르트W.G.Lambert는 주장한다. 그리고 바벨론 창조설화는 여러 남신과 여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신론적 사고에 기초한 신들의 전투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사학자들의 연구는 단지 ‘어휘’의 유사성에서 내용의 유사성을 찾으려는 아주 단순한 연구에 따른 결과에 불과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이 창조기사를 기록한 근본 동기는, ‘바벨론 창조설화’를 기초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창조기사를 기술하려고 하였던 것이 결코 아니다. 히브리인들이 ‘창조기사’를 기술하게 된 근본 동기는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구약신학자 폰 라드von Rad는 “창조사건은 야웨가 정한 역사상의 첫 번째 사건이여,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구원사건과 직결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히브리 족속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면, “스스로 계신 하나님”(출 3:14)으로는 계시하였지만, 그 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행하신 어떠한 분인지는 자세히 계시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창조기사’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물리적 창조 과정을 기술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신앙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왜 그분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구원신앙의 기원Ursprung’을 증언하려 하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존재론적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관계는 구원의 전제라고 히브리인들은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의 기도를 올릴 때,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9-10)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구원자 하나님과 기도자의 관계는 육신의 부모와 자식관계보다도 더 긴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육신의 생명의 근원인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동일한 차원에 있는 축복의 방편이다.(출 20:12; 신 5:16; 마 15:4; 19:19; 막 7:10; 10:19; 눅 18:20) 특히 에베소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여기서 ‘첫 계명’이란, 가장 우선되는 계명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둘이 있을 수 없듯이, 히브리인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의 신앙전승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신 6:4)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주(= 여호와 הוהי)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다.”(시 86:10)라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식이었다. 따라서 한 분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셨으며, 그 한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신앙이었다. 따라서 성경의 창조기사가 증언하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우리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다’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 사도 바울도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을 동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세주(= 메시아)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神)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5-6)
그러므로 구원자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으로 동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포로기에 형성된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 땅을 견고하게 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분은 땅을 혼돈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신 분이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사 45:18, 표준 새번역)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예언의 연장선상에서 증언된 것이다. 따라서 이 증언(사 45:18)을 논리적으로 연관시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 44:8)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5-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 45:17)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 땅을 견고하게 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분은 땅을 혼돈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신 분이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사 45:18, 표준 새번역)
그러나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따라서 결론적 이사야 선지자는 ‘한 분 하나님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구원주’이시지만, 우리들에게는 항상 ‘숨어계신 분Deus absconditus’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자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그의 ‘창조능력’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히브리 족속의 구원역사의 첫 번째 장인 창세기 12장 바로 앞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기사’를 - 모든 인류의 ‘원역사Urgeschichte’로 - 성경의 맨 앞에 배치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11장 3절에서 ‘창조’는 물리학적으로 증명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믿어야 할 과제임을 증언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3. 살아계신 하나님은 만물의 생명을 창조, 보전, 통치하신다.
창조기사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우선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가 살아 갈 수 있는 생태학적 생명여건을 조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첫 번째 생명여건은 ‘빛’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 1:3-4) 그런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빛이 있는 낮’만 있어서도 안 된다. 생명의 휴식을 위한 ‘일하지 않는 휴식의 밤’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을 나누셔서 낮과 밤’으로 만드신 것이다. ‘낮’은 생명(生命)의 생육(生育)을 위한 것이고, ‘밤’은 생명의 휴식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낮’과 ‘밤’은 생명체를 위한 가장 우선적인 생태학적 생명여건이다. 그래서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이 세상을 비추는 빛’(요 12:46; 1:4)으로 증언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세상이 빛을 잃게 되는 날, 그 날은 모든 생명체에게 종말이 오는 날이다. 왜냐하면 빛이 없으면 생명체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도 인류 역사의 마지막 종말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이 세력들은 흔들릴 것”(막 13:24-25)이라고 증언하신 것이다. 태양이 “빛”을 잃어서 온 세상이 어두워지면, 지상의 온도가 떨어져서 모든 생명은 죽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밤’이 없어서 항상 ‘빛’만 비취이면, 이 지구는 너무 뜨거워 모든 생명은 따 죽는다. 그러므로 ‘빛과 어두움’은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첫 번째 생명여건이다.
그런데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언은 고대 근동의 ‘밀의종교’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빛을 창조하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히브리 족속이 출애굽한 이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경험한 것에서 고백되어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1-22) 이러한 ‘빛’으로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경험에 기초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증언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5-7)고 증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할 때는, 그 구원자가 바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승화되어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의 창조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여건’인 ‘빛과 어두움’의 창조로 시작된 것이다.(다음호, 생명체의 두 번째 ‘생명의 여건’으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