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그마 세미나 - Kerygma Semi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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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파일에는 각주도 함께 있습니다.
II-10. 메시아에 대한 약속
(이사야, 40-66〔1-39〕)
*** 외울 성구: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 함께 읽을 성경: 이사야, 40-66(1-39).
*** 토의주제: 1.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2. 자녀들을 징계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 있는가? 3.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자녀에 대하여 그의 성품, 능력, 신앙, 학문적 지식 등에 있어서 부족함 점을 자세히 알고 계시다면, 당신은 그 자녀를 위해서 무엇을 예비하시겠습니까? 4. 당신이 마지막으로 자녀를 위하여 축복기도를 한다면, 어떠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겠습니까? 5. 솔직히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자녀에게도 사랑이 갑니까? 6. 당신의 신앙 속에 ‘내가 하나님과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과 성실하게 살아야지?’하는 결단에 내포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만 있습니까?
A. 예언의 총체로서의 이사야서
이사야서의 보고에 따르면, 예(대)언자, 이사야는 아모스Amos의 아들로서(사 1:1) 유다왕, 웃시야가 죽던 해에 소명을 받았습니다.(사 6:1) 그 후 이사야 예언자는 므낫세 왕까지 활동하였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웃시야(Uzziah= 아샤랴Azariah, 783-742), 요담(Jotham, 742-735), 아하스(Ahaz 735-715), 히스기야(Hezekiah, 715-685/6), 므낫세(Manasseh, 687/6-642) 왕이 유다를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왕하 21장 16절에 의하면, 므낫세 통치 기간 중에 순교하였습니다. 이렇듯 여러 왕을 걸치면서 대언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사야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다양합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이사야서를 3권으로 분권합니다. 첫째 1-39장을 제1이사야, 40-55장을 제2이사야, 그리고 56-66장까지를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에는 전체가 ‘종말론적 선포의 양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한권의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그의 예언활동이 여러 왕들의 통치시기를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언의 내용이 한 가지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점은 그의 예언 활동의 시기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과 관련 있는 것이지, 이사야서 자체의 진정성문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사 7장 14절에 나타난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이 그 후 ‘고난의 종’에 관한 이야기나 61장 ‘여호와 은혜의 해’에 대한 선포가 그 내용면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사야 7장 14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병행 사 8:10)고 선포한 말씀은 이사야 9장 1-7절에서 보다 자세히 ‘한 아이’의 임무와 그의 사역의 특성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진 자의 구원사역을 다시 이사야 43장 3상,5,15절에서는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3b);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사 43: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로 반복해서 증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 61장 1절 이하에서는 -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들고 읽으신 부분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로 바꾸어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사야 66장 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예언서를 맺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 7장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 기필코 성취될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언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서를 예언의 총체적 집대성으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는 카이저Kaiser의 말은 의미 있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이사야’ 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① 유다의 배은망덕(사 1:1-9)과 이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스라엘 왕(국가)에 대한 심판과 포로생활에 대한 예고(사 5:1-30)를 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②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이사야’를 소명하시는지(사 6:1-13)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③ 그리고 난 다음에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표징 된 종말에 도래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와 더불어 ‘세상 왕국의 멸망’(사 10:5-12:6)에 대한 예언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꼭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즉 ④ 왜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가 예루살렘 함락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왕국에 대한 심판(사 13:1-23:18)까지도 예언하고 있는지를 자문自問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왜 ⑤ 이방 열국에 대한 최후 심판을 예언하면서(사 24:1-26:21),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사 27:1-13)을 함께 하고 있는지도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들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이방 민족에게는 ‘멸망의 선포’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선포’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⑥ 이스라엘의 불신자들에게 임한 심판도 선언되고 있다는(사 28:1-33:24) 사실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⑦ 예루살렘의 보호(사 31:9-33:24)와 시온이 받을 구원과 축복(사 34:1-35:1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선포 내용들이 역사적 사건으로 증명된 것이 바로 ⑧ 산헤립의 침략으로부터 유다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건(사 36:1-39:8)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⑨ 왜 예언자 이사야는 패망의 역사적 위기 속에서도 위로와 확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고 있는가? 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상 소위 제1이사야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위 제2이사야의 구원의 메시지를 읽으면,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지를 명백히 이해할 것입니다. ⑩ 왜냐하면 ‘평강의 목적’(사 40:1-48:22), ‘평강의 왕’(49:1-57:21), ‘평강의 계획’(58:1-66:24)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B.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패역한 자신, 이스라엘
사 1:1-5:30에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그 책망을 마치 부모가 자식을 헌신적으로 양육하였건만, ‘부모’의 뜻을 거역한 ‘자식’처럼(1:2), 혹은 포도원 ‘농부’와 ‘포도원’처럼(5:1-7) 유비적analogisch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 5:1-7) 여기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사이間의 필연적이고 존재론적 관계로, 혹은 ‘농부’와 ‘포도원’ 사이의 사회적 고용관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사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더 자세히 말하면 모세 계약(특히 십계명의 제5계명)이 아직도 유효함을 다시금 천명합니다.(출 20:12; 신 5:16) 즉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나,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절대 불변의 하나님의 율법, 곧 천율律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를 지키는 것이 축복의 통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참고 엡 6:1-2)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는 가장 보편적인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유비적 관계로 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면서도(사 2:5-3:15; 5:8-30), 다른 한편 ‘자식’인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영원히 멸하지 않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선포합니다.(2:1-4; 4:2-6)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잘 못을 회개하고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된 미래의 평화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촉구하는 것에 궁극적인 초점이 있었습니다.(사 2:1-4) 즉 이사야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현재의 죄악을 회개하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궁극적인 내용은 1-39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40-55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사야 40-55장은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명명한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C. 신앙의 부패는 나라의 패망을 가져온다.
사 1:1-9에서 보고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이나, 포도원 농부의 배은망덕, 곧 ‘들 포도를 맺은’ 이스라엘에 대한 죄악(사 5:1-7)은 결국 신앙의 부패, 곧 공의와 정의가 없는 형식적인 종교 행위을 의미합니다.(사 1:10-16) 그래서 이사야는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고 촉구합니다. 그러면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겨지리라”(사 1:18-20)고 이사야는 회개에 따른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짓되고 형식적인 예배행위(사 1:11,15), 곧 공의와 정의가 없는 신앙행위와는 반대로 이사야는 참된 신앙행위, 곧 여러 스랍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드리는 예배행위를 이사야는 ‘환상Vision’ 속에서 목격합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소명기사입니다.(사 6:1-13) 이사야 소명기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사 6:3)이시고, 인간은, 곧 이스라엘 백성은 ‘입술이 부정한 자’(6:5)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부정한 입술에 있는 ‘악’이 제거되어야 할 존재, 곧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사 6:7)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위탁받은 선포의 내용입니다.(사 6:9-10) 즉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고대하시면서, 예언자를 파송하시면서는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사 6:10) 염려하시는가? 그것은 ‘남은 자’, 곧 ‘거룩한 씨’(사 6:13; 스 9:2)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사야처럼 ‘죄 사함을 받은 자’(사 6:7),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거룩한 씨’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패역한 백성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기)”(사 6:9) 때문입니다. 즉 멸망하는 자는 구원의 복음을 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참고. 고전 1:18) 그러므로 ‘공의로 파멸이 작정된 자’(사 10:22)는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상 중에서 끝까지 행하시리(니)”(사 10:23)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사 6:10)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께도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마 13:10)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여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고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과 순종은 인간의 이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함을 증언한 것이다.(참고. 고전 2:7-14)
D. 구원의 총제적 ‘표징’으로서의 ‘임마누엘’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는 당대에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왕 ‘아하스’에게 주신 징조, 곧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예언은 존재적으로 ‘평화의 왕’, 곧 ‘메시야의 탄생과 그의 통치’로 바꾸어 예언되고 있습니다.(사 9:1-7) 뿐만 아니라,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징조는 ‘이새의 뿌리에 의한 의로운 자의 통치’, 곧 종말론적 ‘평화의 나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사 11:1-9) 그리고 ‘평화의 왕’의 구원과 통치로 건설되는 ‘평화의 나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바꾸어 말하면, ‘거룩한 씨’, 혹은 ‘남은 자’들은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사 12:2-5)
그런데 ‘임마누엘’, 곧 메시야 탄생에 대한 예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복음서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마 1:20-23, 비교 눅 2:1-7) 그리고 곧 ‘메시야의 탄생과 그의 통치’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시작된 공생애로 성취되었습니다.(마 4:12-17) ‘이새의 뿌리’, 곧 다윗 왕의 계보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의 의로운 왕이 통치하는 ‘평화의 나라’에 대한 예언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계 21:3-7) 그리고 끝으로 ‘거룩한 씨’들이 ‘평화의 왕’, 곧 신약의 표현에 의하면 대속의 죽음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에게 드릴 ‘감사의 찬양’은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성취 될 것입니다.(계 5:9-13)
이상 살펴본 사실들에 근거해 볼 때, 예언자 ‘이사야’에게 있어서의 ‘임마누엘 징조’는 단지 처녀가 잉태할 ‘한 아이ein Kind’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아이로 인하여 실현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표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임마누엘’은 존재적으로 보면, 도래할 ‘메시아’의 이름이며, 동시에 그가 행할 구원사건의 특징이며,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씨’, 곧 ‘남은 자’와 함께 건설한 ‘왕국’의 상태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로 인하여 받은 ‘구원받은 자들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소위 제2, 3이사야서(사 40:1-66:24)에 이러한 ‘임마누엘’의 표상을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나머지는 이어서 다음 번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